남아공이 ICC WTC 우승으로 ‘초크’ 오명을 벗고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사회 통합과 테스트 크리켓의 가치를 함께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자 크리켓 대표팀이 2025 ICC 월드 테스트 챔피언십(WTC) 결승전에서 강호 호주를 꺾고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 승리는 스포츠를 넘어선 깊은 상징성을 지닌다. 그간 국제 대회에서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하며 ‘초크(choke)’의 대명사로 불렸던 남아공이 마침내 심리적 굴레를 벗어나 세계 정상에 섰다. 이 과정은 스포츠에서의 승부를 넘어, 인종 통합, 국가 정체성 재정립, 크리켓 포맷의 가치 재확인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실패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남아공의 첫 ICC 메이저 우승
남아공은 크리켓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ICC 대회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ODI와 T20 월드컵 본선에 총 18회 진출했지만 결승 무대는 단 한 차례뿐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4강 또는 그 이하에서 탈락했다. 이로 인해 오랜 기간 ‘언제나 강하지만 끝에 가선 무너지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1998년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ICC 노크아웃 트로피와 같은 예외적인 성공이 있었지만, 현재 포맷의 글로벌 이벤트에서는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WTC 결승전은 그 틀을 완전히 깨는 순간이었다. 남아공은 디펜딩 챔피언 호주를 상대로 침착하게 점수차를 유지하며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이닝에서 추가로 69점을 올려 5위킷 차 승리를 기록하며, 남아공은 자력으로 국제 대회에서 처음으로 테스트 크리켓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는 단순한 승리를 넘어 국가 스포츠 역사에서의 새로운 챕터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초크’의 굴레를 끊고 심리적 한계를 극복한 상징적 장면
‘초크’는 남아공 크리켓을 설명하는 대표적 단어였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무너져 승리를 놓치는 장면들이 반복되며, 이 단어는 국내외에서 남아공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심지어 일부 호주 선수들은 경기 중 이를 언급하며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WTC 결승에서 남아공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경기 중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했고, 승부를 자신들의 흐름으로 이끌었다. 템바 바부마 주장은 경기 후 “이제 더는 ‘초크’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는 남아공 팀이 더 이상 과거의 틀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또한, 에이든 마크람은 경기 후 관중석에서 학창시절 친구와 맥주를 나누며 승리를 축하했다. 이는 스포츠가 개인의 기억과 공동체의 경험으로 확장되는 대표적 장면이자, 이번 우승이 선수 개개인에게 어떤 감정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바부마를 통한 인종 통합의 진전
이번 승리의 또 다른 중심에는 템바 바부마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남아공 크리켓 역사상 최초의 흑인 주장으로, 과거 백인 중심이었던 대표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바부마는 또한 남아공 대표팀 최초의 흑인 타자이자, 국제 경기에서 첫 흑인 센추리 기록을 세운 선수이기도 하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남아공은 스포츠 분야에서도 인종 통합을 추구해왔다. 그 과정에서 대표팀의 인종 구성은 점차 다양화되었으며, 바부마의 존재는 이러한 변화의 상징이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스포츠는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남아공 럭비 대표팀 주장 시야 콜리시 역시 흑인 리더로서 2019년과 2023년 월드컵에서 남아공을 정상으로 이끈 바 있다. 두 인물은 남아공 스포츠계가 실질적인 다양성과 포용을 실현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세계에 보냈다.
경기 후 바부마는 “이 승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며,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스포츠가 과거의 갈등을 치유하고 미래의 통합을 지향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테스트 크리켓 형식의 의미와 미래 과제
WTC는 테스트 크리켓 포맷의 존속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출범했다. 최근 T20과 같은 짧은 포맷의 인기가 높아지며, 테스트 크리켓은 상업성과 시청률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테스트 형식은 전략적 깊이, 선수들의 기술 완성도, 경기 운영의 복합성 등에서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에이든 마크람은 “크리켓의 모든 포맷이 중요하지만, 테스트 크리켓은 남아공에서 가장 큰 자부심이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 승리를 통해 긴 시간 동안 버텨야 하는 경기 형식이 지닌 가치가 재조명되길 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은 WTC 우승 이후인 2025~26 시즌 동안 테스트 크리켓 국제경기 일정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는 각국의 방송사 관심도와 상업성에 따라 경기 일정이 결정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WTC 우승을 계기로 테스트 크리켓의 위상과 존속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질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국가 정체성과 스포츠의 재정의
남아공의 이번 WTC 우승은 국가적 자존감을 회복하고, 스포츠를 통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기간 ‘초크’의 이미지에 갇혀 있던 대표팀이, 세계 정상에 서면서 국가 전체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크리켓이라는 경기 안에 인종, 역사, 계급, 심리 등 다양한 요소가 응축되어 있으며, 이번 우승은 그 모든 층위를 동시에 건드리는 드문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단순한 트로피 이상의 사회적 울림을 가진 사건으로, 남아공은 이제 ‘세계 챔피언’이라는 새로운 명함을 얻게 되었다.
‘초크’를 넘은 우승, 스포츠와 사회를 잇는 역사적 승리
남아공은 ICC WTC 우승을 통해 오랜 스포츠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인종 통합과 국가 정체성 재정립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