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내성암호(PQC)는 양자컴퓨터 공격에도 안전한 차세대 암호화 기술이다. NIST 표준화와 QRL 같은 실제 구현 사례를 통해 블록체인이 양자시대를 대비하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가 기존 암호화 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암호화폐 업계는 단순히 손 놓고 있지 않다. 오히려 차세대 보안 기술인 ‘양자내성암호(Post-Quantum Cryptography, PQC)’를 통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마치 백신을 미리 맞아 질병을 예방하듯, 블록체인 생태계는 양자시대를 대비한 방어막을 이미 구축 중이다.
PQC란 무엇인가?
양자내성암호는 말 그대로 양자컴퓨터로도 해독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차세대 암호화 기술이다. 기존의 RSA나 타원곡선 암호(ECC)가 소인수분해의 어려움에 의존한다면, PQC는 양자컴퓨터조차 풀기 어려운 완전히 다른 수학적 난제를 기반으로 한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양자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수년 전부터 PQC 표준화 작업을 진행해왔다. 전 세계 수많은 암호학자들이 제출한 알고리즘 중에서 엄격한 검증을 거쳐 표준 후보를 선정했다. 올해 3월에는 코드 기반 알고리즘인 HQC가 추가 표준 후보로 선정되어 PQC 표준의 범위가 더욱 확대됐다.
우리나라 역시 국가정보원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도하여 한국형 양자내성암호(KpqC) 확보를 위한 공모전을 진행했다. 올해부터는 에너지, 의료, 행정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양자내성암호 시범전환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양자 보안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PQC의 핵심 알고리즘
양자내성암호는 여러 수학적 난제를 기반으로 하며, 각각의 특성과 장단점이 있다.
격자 기반 암호(Lattice-based Cryptography)
다차원 공간에서 규칙적으로 배열된 점들의 집합인 격자에서 가장 짧은 벡터를 찾는 문제를 활용한다. 현재 NIST PQC 표준의 주력으로, CRYSTALS-Kyber(키 교환용, ML-KEM으로 표준화), CRYSTALS-Dilithium(전자서명용, ML-DSA로 표준화), FALCON 등이 대표적이다.
마치 미로에서 최단 경로를 찾는 것과 비슷한데, 차원이 증가할수록 경로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양자컴퓨터조차 효율적으로 풀 수 없다. 속도, 보안성, 키 크기 측면에서 균형이 좋아 가장 널리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해시 기반 암호(Hash-based Cryptography)
해시 함수를 이용한 전자서명 방식으로, 수학적 난제가 아닌 해시 함수의 일방향성에 의존한다. SPHINCS+(SLH-DSA로 표준화)가 대표적이며, 매우 보수적인 보안 강도를 제공한다. 다른 PQC 알고리즘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있다.
코드 기반 암호(Code-based Cryptography)
오류 정정 코드 이론에 기반한 암호로, 1978년 맥엘리스가 제안한 이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McEliece와 HQC 등이 대표적이다. HQC는 올해 NIST PQC 추가 표준 후보로 선정됐으며, McEliece는 장기 데이터 보관용으로 높은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다. 단, 공개키 크기가 매우 크다는 단점이 있다.
블록체인에 PQC를 적용하는 방법
블록체인에 양자내성암호를 적용하는 것은 단순히 알고리즘을 교체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 시스템과의 호환성, 성능 저하, 네트워크 부담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하이브리드 접근 방식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기존 암호화 방식과 PQC를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기법이다. 예를 들어, 키 교환 시 기존의 타원곡선 암호와 CRYSTALS-Kyber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두 방식 중 하나라도 안전하다면 전체 시스템이 보호되므로, 표준화가 완료되기 전에도 양자 위협에 대비할 수 있다.
삼성SDS를 비롯한 국내외 기업들은 기존 암호화 표준 키 교환 방식과 PQC KEM 기반 키 교환 방식을 통합한 PQC 하이브리드 TLS 암호통신 구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점진적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술이다.
스마트컨트랙트와 지갑 보호
블록체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거래 서명과 지갑 주소 생성 과정이다. 이더리움과 카르다노 같은 주요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스마트컨트랙트에 PQC 서명 방식을 적용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개인 키를 PQC 알고리즘으로 보호하고, 거래 서명에 양자 저항성 디지털 서명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실제 구현 중인 프로젝트 사례
이론적 논의를 넘어, 실제로 PQC를 구현한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이 이미 존재한다.
QRL(Quantum Resistant Ledger)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QRL이다. QRL은 처음부터 양자 저항성을 목표로 설계된 블록체인으로, 해시 기반 서명 방식인 XMSS(eXtended Merkle Signature Scheme)를 채택했다. NIST가 승인한 이 방식은 각 거래마다 고유한 일회용 서명을 생성하여 양자컴퓨터의 공격에도 안전하다.
QRL은 최근 SPHINCS+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으며, ‘Project Zond’를 통해 이더리움 가상머신(EVM)과 호환되는 지분증명(PoS)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솔리디티 개발자들이 기존 이더리움 스마트컨트랙트를 양자 저항성 플랫폼으로 쉽게 이전할 수 있도록 개발자 친화적 도구를 제공한다.
기타 양자 저항성 프로젝트
IOTA는 WOTS(Winternitz One-Time Signature)를 활용한 양자 저항성 구현을 계획 중이며, Bitcoin Post-Quantum(BPQ)는 비트코인에 PQC 기술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HyperCash(HC)는 격자 기반 암호화를 채택한 사례다.
양자내성암호의 한계와 과제
PQC가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여러 기술적 한계와 과제가 존재한다.
처리 속도와 네트워크 부담
PQC 알고리즘은 기존 암호화 방식보다 키 크기가 크고 연산량이 많다. 이는 거래 처리 속도 저하와 네트워크 대역폭 증가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McEliece의 공개키는 수백 킬로바이트에 달해 블록체인에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
전환의 어려움
이미 수백만 개의 지갑과 수십억 달러의 자산이 기존 암호화 방식으로 보호되고 있다. 이를 PQC로 전환하려면 모든 노드가 새로운 방식을 채택해야 하고, 수백만 개의 키를 안전하게 재생성해야 한다. 과거 DES에서 AES로의 전환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던 것처럼, PQC 전환 역시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비트코인이 완전히 PQC로 전환할 경우, 네트워크가 상당 기간 동안 성능 저하를 겪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이는 양자 위협을 고려하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결론: ‘보안의 진화’는 이미 시작됐다
암호체계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DES에서 3DES를 거쳐 AES로, RSA에서 타원곡선 암호로의 변화처럼, 이제는 PQC로의 전환이 필연적인 단계다. 양자컴퓨터가 가져올 위협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블록체인의 다음 단계는 ‘양자 안전성’이다. NIST의 표준화, 주요 국가들의 전환 계획, 그리고 QRL 같은 선구적 프로젝트들의 성과는 이러한 진화가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이 향후 수년 내에 양자 위협이 현실화될 것으로 예상하는 만큼, 지금이 바로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기술적 진화는 단순히 보안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양자 저항성 블록체인은 새로운 산업 기회를 창출하고, 장기적으로 안전한 디지털 자산 보관을 가능하게 하며, 미래 디지털 경제의 신뢰 기반이 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PQC 기술이 어떻게 투자 기회로 이어지고,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는지 살펴보겠다.